시장의 크기와 모양
2024년 세계 반도체 매출은 약 6,300억 달러다. 1986년의 약 260억 달러에서 40년 가까이 24배쯤 커졌다. 그러나 그 길은 직선이 아니었다. 몇 년마다 한 번씩 30% 가까이 꺼졌다가 다시 튀어 올랐다. 이 장은 그 시장을 세 가지 칼로 자른다. 무엇을 파는가(제품), 누가 사 가는가(응용), 어디로 팔리는가(지역). 그리고 1등 회사의 이름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다시 한국과 AI로 바뀌어 온 과정을 따라간다.
- 세계 반도체 시장의 크기(2024년 약 6,300억 달러)를 다른 산업·세계 경제와 견주어 말한다.
- 40년 매출 곡선에서 큰 하락과 반등이 언제, 왜 있었는지 짚는다.
- 연평균 성장률(CAGR)을 계산하고, 1~2%p 차이가 10년 뒤 얼마나 큰 차이가 되는지 설명한다.
- 제품별(로직·메모리·아날로그 …)·응용별(데이터센터·스마트폰·자동차 …) 비중을 말한다.
- 칩 시장 = 기기 수 × 기기당 칩 금액이라는 분해로 응용 시장의 성장을 읽는다.
- 칩을 사 가는 지역과 부가가치를 만드는 지역이 왜 다른지 설명한다.
- AX-1의 첫해 목표 매출 100억 달러가 시장에서 어느 정도 크기인지 계산한다.
6,300억 달러는 얼마나 큰가
숫자가 크면 감이 오지 않는다. 6,300억 달러는 한국 정부 1년 예산(약 650조 원, 2024)보다 조금 작고, 세계에서 팔리는 스마트폰 완제품 값을 다 합친 것보다 조금 크다. 아래에서 네모의 면적이 금액이다. 반도체 네모를 기준으로 다른 산업이 몇 배인지 눈으로 견주어 본다.
반도체 시장을 다른 산업 옆에 놓으면
면적이 금액에 비례한다. 다른 네모 안의 점선 사각형은 반도체 시장의 크기다.
반도체 시장은 세계 GDP의 약 0.6%에 불과하다. 자동차 산업의 4분의 1, 의약품 시장의 절반이 안 된다. 그런데도 이 산업이 정책과 뉴스의 한가운데 있는 까닭은 크기가 아니라 위치 때문이다. 6,300억 달러어치의 칩 위에 스마트폰·PC·서버·자동차·통신망 같은 수조 달러의 전자 제품과 그 위의 디지털 서비스가 올라탄다. 칩이 한 달만 끊겨도 그 위의 산업이 멈춘다는 것을 2021년 자동차 공장들이 보여 주었다.
40년 매출 곡선
세계 반도체 무역 통계 기구 WSTS(World Semiconductor Trade Statistics)는 1986년부터 회원사의 판매액을 모아 세계 시장 규모를 낸다. 그 곡선을 그려 보면 두 가지가 한꺼번에 보인다. 길게 보면 꾸준히 오르는 추세, 짧게 보면 크게 출렁이는 사이클이다.
아래 곡선의 번호 표시를 눌러 큰 사건을 하나씩 열어 보자. 아래쪽 막대는 전년 대비 성장률이다. 세로축을 로그로 바꾸면 '같은 비율의 성장'이 같은 기울기로 보인다.
세계 반도체 매출 40년: 추세와 출렁임
막대가 빨간 해를 세어 보면 40년 동안 아홉 번쯤이다. 그중 2001년(약 −32%)과 2019년(약 −12%), 2009년(약 −9%), 2023년(약 −8%)이 크다. 하락 뒤에는 거의 언제나 두 자릿수 반등이 왔다. 이 출렁임이 왜 생기는지, 공장을 짓는 데 걸리는 2년이 어떻게 호황을 불황으로 바꾸는지는 3장에서 직접 돌려 본다.
메모리를 겹쳐 보면 패턴이 선명하다. 메모리는 2017년 한 해 약 60% 늘었고, 2019년 약 33% 줄었고, 2023년에는 약 29% 줄었다가 2024년 약 80% 늘었다. 메모리는 제품이 표준화되어 있어 가격이 수급에 따라 크게 움직인다. 메모리가 전체 시장의 20~30%를 차지하니, 메모리가 흔들리면 전체가 흔들린다. 자세한 사정은 10장에서 다룬다.
성장률로 읽기
들쭉날쭉한 곡선을 한 숫자로 요약하는 방법이 연평균 성장률(CAGR, Compound Annual Growth Rate)이다. 시작 값과 끝 값만 보고, 그 사이를 매년 같은 비율로 자랐다고 치면 그 비율이 얼마인가를 묻는다.
아래에서 손잡이 A와 B를 곡선 위로 끌어 구간을 바꿔 본다. 세로축이 로그이므로 일정한 성장률은 직선이 된다. 오른쪽 부채꼴은 2025년 이후를 일정한 성장률로 늘린 가상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 1%p의 차이가 10년 뒤 만드는 것
연 6%면 2025년 약 7,500억 달러가 약 5년 뒤 1조 달러에 닿는다. 연 4%면 약 8년이 걸린다. 업계 단체와 조사 기관들이 "2030년 무렵 1조 달러"를 말할 때 깔고 있는 가정이 대략 연 6~8%다. 2%p 차이가 10년을 쌓이면 2035년 값이 약 20% 달라진다. 숫자 하나의 가정이 공장 몇 개 분의 투자 결정을 가른다.
무엇을 파는가: 제품별
WSTS는 칩을 일곱 갈래로 나눈다. 계산을 하는 로직(Logic), 저장하는 메모리(Memory), 전압과 신호를 다루는 아날로그(Analog), 작은 제어용 프로세서와 CPU를 묶은 마이크로(Micro), 빛을 다루는 광소자(Opto), 전력용 개별 소자(Discretes), 센서(Sensors)다. 앞의 둘이 시장의 60%를 넘는다.
아래 트리맵에서 네모의 면적이 매출이다. 네모를 누르면 그 안으로 들어가 세부 품목을 본다.
제품별 시장 트리맵 (2024)
로직과 메모리는 성격이 정반대다. 로직은 회사마다 설계가 다른 '주문형' 제품이라 값이 잘 무너지지 않는다. 메모리는 규격이 같은 '원자재형' 제품이라 같은 칩을 세 회사가 팔고, 가격이 수급에 따라 몇 분기 만에 절반이 되기도 한다. 아날로그·개별 소자·센서는 작고 오래가는 칩이 많다. 한 번 자동차나 공장 설비에 채택되면 10년 넘게 팔리고, 성숙 공정(수십~수백 nm)으로 만든다.
2024년의 변화는 로직 안에서 일어났다. 데이터센터용 AI 가속기 한 품목이 약 900억 달러 규모로 커지며, 몇 년 전에는 없던 크기의 네모가 생겼다. 메모리 안에서는 그 가속기 옆에 붙는 HBM이 같은 이유로 커졌다.
누가 사 가는가: 응용별
같은 시장을 이번에는 칩이 들어가는 기기로 자른다. 2024년에는 데이터센터·PC를 합친 컴퓨팅이 약 36%, 스마트폰을 포함한 통신이 약 30%, 자동차와 산업이 각각 10%를 조금 넘는다.
응용별 시장: 칩은 어떤 기기로 가는가
응용 시장 하나의 크기는 두 숫자의 곱이다. 한 해에 팔리는 기기 수, 그리고 기기 한 대에 들어가는 칩 금액이다.
아래 그림에서 사각형의 가로가 출하량, 세로가 기기당 칩 금액, 면적이 칩 시장이다. 모서리를 끌어 사각형을 바꿔 본다. 점선은 2024년 기준이다.
기기 수 × 기기당 칩 금액 = 칩 시장
스마트폰과 PC는 출하량이 거의 늘지 않는 성숙 시장이다. 그래도 칩 시장이 자라는 것은 기기 한 대에 들어가는 칩 금액이 커지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그 효과가 가장 크다. 내연기관 차에 약 500~600달러, 전기차에 약 1,000~1,500달러어치의 칩이 들어간다는 추정이 많다. 서버는 반대로 출하량은 수천만 대에 불과하지만, AI 가속기 8개가 들어간 서버 한 대의 칩 금액이 일반 서버의 수십 배라 평균을 끌어올린다. 기기별 칩 함량은 12장에서 자세히 뜯어본다.
어디로 팔리는가: 지역별
지역별 통계는 두 가지가 있다. 칩을 사 가는 곳(판매 통계)과 칩의 부가가치를 만드는 곳(회사 본사·공장 기준)이다. 두 지도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칩을 사 가는 곳 vs 가치를 만드는 곳
중국이 세계 칩의 약 30%를 사 가는 것은 세계 전자 제품의 상당수가 중국에서 조립되기 때문이다. 미국 회사의 스마트폰이라도 조립 공장이 중국에 있으면 그 안의 칩은 중국으로 팔린 것으로 잡힌다. 반대로 부가가치를 만드는 몫은 미국이 약 39%로 압도적이다. 설계와 설계 도구, 장비에서 미국 회사의 몫이 크기 때문이다. 이 두 지도의 차이가 13장의 공급망 지리와 14장의 지정학 갈등이 생기는 자리다.
누가 1등인가: 순위의 변천
1990년 세계 반도체 매출 상위 10개 회사 가운데 6개가 일본 회사였다. 2000년에는 인텔이 압도적 1위였고, 2010년대에는 삼성전자가 인텔을 추격했다. 2024년에는 엔비디아가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아래 막대 경주를 재생해 본다.
상위 10개 회사 순위, 1990 → 2024
순위의 변천은 산업의 무게중심이 어디로 옮겨 갔는지를 보여 준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은 DRAM으로 세계를 휩쓸었지만, 1990년대 한국과의 메모리 경쟁, 미·일 반도체 협정, 그리고 회사마다 모든 것을 직접 하는 구조가 겹치며 하나씩 순위에서 밀려났다. 2000년대의 주인공은 PC의 두뇌를 파는 인텔이었고, 2010년대에는 스마트폰과 데이터센터 덕에 메모리와 팹리스(퀄컴·브로드컴·미디어텍·엔비디아)가 올라섰다. 2024년 1위 엔비디아는 공장이 하나도 없는 팹리스다. 공장 없는 회사가 1위가 된 이유는 4장의 사업 모델에서 다룬다.
순위표에서 한 가지 더 볼 것은 상위 10사의 합이다. 1990년 약 65%였던 상위 10개사의 몫은 2000년 약 53%, 2010년 약 50%로 내려갔다가 2024년 약 72%로 올라왔다. 2010년대까지는 회사 수가 늘며 시장이 흩어졌고, 2020년대에는 AI와 메모리의 큰 회사들로 다시 모였다. 다만 회사별 매출에는 네트워크 장비·소프트웨어 같은 비반도체 매출이 섞이는 경우가 있어 단순 비교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AX-1이 들어갈 시장
이 책이 따라가는 가상의 칩 AX-1은 가상의 팹리스 노바실리콘이 설계하는 데이터센터용 AI 가속기다. 첫해 목표는 40만 개, 개당 25,000달러다. 곱하면 매출 100억 달러다. 이것이 시장에서 얼마나 큰 덩어리인지, 세계 시장 → 데이터센터·PC → AI 가속기 순으로 좁혀 들어가며 본다.
AX-1 100억 달러를 시장 안에 놓아 보기
100억 달러짜리 목표는 시장의 어디에 놓이는가
AX-1의 첫해 목표 매출은 40만 개 × 25,000달러 = 100억 달러다. 2024년 세계 반도체 시장 약 6,300억 달러의 약 1.6%, 데이터센터·PC 응용(약 36%, 약 2,270억 달러)의 약 4.4%, 데이터센터 AI 가속기 시장(약 1,400억 달러, 추정)의 약 7%다. 2024년 회사별 매출로 치면 칩 판매 회사 가운데 16위 안팎에 해당한다. 신생 팹리스의 첫 제품으로는 매우 공격적인 목표다.
이 목표가 터무니없지 않은 이유는 시장 자체가 빨리 크기 때문이다. 세계 시장이 연 6~9%로 자란 반면, AI 가속기 시장은 2023~2024년 사이 몇 배로 커졌다. 같은 100억 달러라도 시장이 클 때 출시하면 점유율 부담이 줄어든다. 반대로 이 장의 40년 곡선이 보여 주듯, 시장은 몇 년마다 꺾인다.
핵심 정리
- 세계 반도체 매출은 2024년 약 6,300억 달러로, 세계 GDP의 약 0.6%다. 크기보다 그 위에 수조 달러의 전자 제품과 디지털 서비스가 올라탄다는 위치가 중요하다.
- 1986년 약 260억 달러에서 2024년까지 연평균 약 9%로 자랐다. 대략 8년마다 두 배다. 그러나 2001년(약 −32%), 2009년, 2019년, 2023년처럼 몇 년마다 크게 꺾였다.
- 전체 시장의 출렁임은 상당 부분 메모리에서 온다. 메모리는 표준 제품이라 가격이 수급에 따라 크게 움직인다.
- CAGR은 시작점과 끝점에 민감하다. 1~2%p의 성장률 차이가 10년이면 20% 안팎의 규모 차이가 된다.
- 제품별로는 로직(약 2,150억 달러)과 메모리(약 1,650억 달러)가 60%를 넘는다. 2024년에는 AI 가속기와 HBM이 각 범주 안에서 가장 빨리 컸다.
- 응용별로는 데이터센터·PC 약 36%, 통신 약 30%, 자동차 약 12%, 산업 약 11%다. 응용 시장 = 기기 출하량 × 기기당 칩 금액이고, 성숙한 기기 시장에서도 칩 함량이 커지면 칩 시장이 자란다.
- 칩을 사 가는 곳(중국 약 30%, 조립 공장 기준)과 부가가치를 만드는 곳(미국 약 39%)은 다르다.
- 상위 10개 회사는 1990년 일본 6개에서 2024년 미국 중심으로 바뀌었고, 2024년에는 공장이 없는 엔비디아가 처음 1위에 올랐다.
확인 퀴즈
세계 반도체 매출이 2000년 약 2,040억 달러에서 2001년 약 1,390억 달러가 되었다. 이 하락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1986년 약 260억 달러였던 시장이 2024년 약 6,300억 달러가 되었다. 연평균 성장률(CAGR)에 가장 가까운 것은?
중국은 세계 반도체의 약 30%를 사 가지만, 반도체 부가가치에서 차지하는 몫은 약 10%다. 이 차이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1990년 세계 반도체 매출 상위 10개 회사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