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사이클
반도체 시장은 40년 동안 연평균 약 9%씩 컸다. 그런데 그 길은 매끄럽지 않았다. 한 해에 30% 넘게 뛰었다가 이듬해 30% 가까이 꺼진다. 메모리는 더 심하다. 이 출렁임을 실리콘 사이클(Silicon cycle)이라 부른다. 원인은 놀랄 만큼 단순하다. 공장을 짓는 데 2년이 걸리고, 모두가 같은 신호를 보고 동시에 움직인다. 이 장에서는 실제 매출 곡선을 먼저 보고, 지연·채찍 효과·거미집이라는 세 가지 장치로 사이클을 직접 만들어 본 다음, 그 속에서 언제 투자하고 언제 출시할지를 따진다.
- 1987~2025년 세계 반도체 매출의 성장률에서 큰 호황과 불황을 짚고, 메모리의 진폭이 전체보다 몇 배 큰지 말한다.
- 증설 지연과 투자 공격성이 어떻게 저절로 반복되는 사이클을 만드는지 모델로 보인다.
- 공급망의 위로 갈수록 주문이 부풀려지는 채찍 효과를 설명한다.
- 메모리 가격이 왜 로직보다 크게 흔들리는지 가격 탄력성과 거미집 모형으로 설명한다.
- 재고와 가격 변화로 지금 사이클의 국면을 읽고, 역주기 투자가 유리한 이유를 말한다.
- AX-1의 출시 시점이 HBM·웨이퍼 원가와 판매 가능 수량을 어떻게 바꾸는지 계산한다.
40년의 파도
세계 반도체 매출은 1986년 약 260억 달러에서 2024년 약 6,300억 달러로 커졌다. 24배다. 그런데 해마다 성장률을 막대로 세워 보면 그림이 전혀 다르다. 막대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린다. 역성장한 해가 열 번 가까이 된다.
아래 그래프에서 막대 위에 마우스를 올리면 그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온다. 누르면 아래 설명이 바뀐다. "메모리 겹쳐 보기"를 켜면 2011년부터의 메모리 매출 성장률이 선으로 겹친다.
세계 반도체 매출, 해마다 얼마나 흔들렸나
2001년 닷컴 붕괴 때 시장은 약 32% 줄었다. 2009년 금융위기, 2019년과 2023년 메모리 불황도 선명하다. 반대로 2000년, 2010년, 2021년에는 30% 안팎으로 뛰었다. 큰 하락 뒤에는 거의 언제나 큰 반등이 온다. 그리고 메모리 선은 전체 막대보다 세 배쯤 크게 움직인다. 2023년 메모리 매출은 약 30% 줄었고, 2024년에는 약 80% 늘었다.
경기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것은 크기와 규칙성이다. 세계 경제는 해마다 몇 % 안에서 움직이는데 반도체는 수십 %씩 움직인다. 그리고 경기 침체가 없던 해(1996년, 2019년, 2023년)에도 불황이 왔다. 사이클의 상당 부분은 산업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그 장치를 하나씩 보자.
공장을 짓는 2년이 사이클을 만든다
첫 번째 장치는 지연(Lag)이다. 칩이 모자라 가격이 오르면 회사들은 증설을 결정한다. 하지만 클린룸을 짓고 장비를 들여 수율을 올리기까지 약 1.5~2년이 걸린다. 그동안 가격은 계속 높고, 높은 가격은 더 많은 증설 결정을 부른다. 2년 뒤 그 모든 생산 능력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이번에는 칩이 남는다. 가격이 무너지고 투자가 멈춘다. 2년 뒤에는 다시 모자란다.
이 고리를 숫자로 돌려 보자. 수요는 분기마다 2%씩 꾸준히 큰다. 가격은 수요와 생산 능력의 비율로 정해지고, 회사들은 가격이 높을수록 증설을 늘린다. 증설은 지연 \(L\) 분기 뒤에 생산 능력이 된다. 처음에는 기본값(지연 6분기, 공격성 1.2)으로 재생해 보고, 지연을 늘리거나 공격성을 올려 보자.
지연이 사이클을 만든다: 20년 재생
지연이 짧으면 생산 능력이 수요를 바로 따라잡아 가격이 1 근처에 머문다. 지연이 길거나 회사들이 가격에 과민하게 반응하면, 아무 외부 충격이 없는데도 가격이 몇 년 주기로 오르내린다. 이것이 내생적 사이클(Endogenous cycle)이다. 외부 충격은 방아쇠일 뿐이고, 진폭과 주기는 산업 구조가 정한다.
실제 반도체 사이클의 주기는 대략 3~5년이다. 팹 건설 1.5~2년, 장비 리드타임 6개월~1년 이상(EUV 노광기는 1년 넘게), 수율 안정화 몇 분기를 더하면 모델의 지연 6~10분기와 비슷하다. 세계 반도체 설비투자는 2022년 약 1,800억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2023년에 줄었다. 정점에서 결정한 투자가 수요가 꺾인 뒤에 들어오는 모습은 모델과 같다.
메모리는 왜 더 크게 흔들리나
같은 사이클 안에서도 메모리 매출은 전체보다 세 배 크게 움직였다. 이유는 가격이 정해지는 방식에 있다. DRAM과 NAND는 회사가 달라도 규격이 같은 범용품(Commodity)이다. 사는 쪽은 가장 싼 곳에서 산다. 그리고 팹은 한 번 지으면 가동을 멈추는 것보다 싸게라도 파는 편이 손해가 적다. 감가상각이 원가의 큰 몫이라 웨이퍼 한 장을 더 돌리는 변동비는 작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요가 줄면 물량은 그대로이고 가격이 무너진다.
로직은 다르다. 파운드리는 고객과 분기·연 단위 계약 가격으로 웨이퍼를 팔고, 칩마다 설계가 달라 다른 회사 칩으로 갈아 끼울 수 없다. 수요가 줄면 가격 대신 가동률이 내려간다. 아래에서 화면을 좌우로 끌어 수요를 옮겨 보자. 왼쪽과 오른쪽에서 매출 사각형(가격 × 물량)의 넓이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본다.
같은 수요 감소, 다른 매출 감소
탄력성이 0.5면 수요가 10% 줄 때 메모리 가격은 약 19% 떨어진다. 생산량이 그대로이니 매출도 약 19% 준다. 로직은 10%만 준다. 탄력성이 낮을수록 차이는 더 벌어진다. 반도체 수요는 단기적으로 비탄력적이다. 스마트폰 한 대에 들어갈 DRAM 양은 DRAM 값이 싸졌다고 당장 두 배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작은 수요 변화가 큰 가격 변화가 된다. 앞 시뮬레이터의 가격 민감도 \(k\)가 바로 \(1/\varepsilon\)이다.
거미집: 어제의 가격으로 오늘을 정한다
메모리 가격의 출렁임에는 또 하나의 고전적 설명이 있다. 농산물 시장에서 처음 관찰된 거미집 모형(Cobweb model)이다. 생산자는 올해 가격을 보고 내년 생산량을 정한다. 내년에 그 물량이 쏟아지면 가격은 수요 곡선이 정하는 대로 떨어진다. 그 낮은 가격을 보고 다음 해 생산을 줄이면 이번에는 가격이 뛴다. 가격과 물량을 오가는 경로가 거미줄처럼 보인다.
경로가 가운데(균형)로 모이느냐 밖으로 퍼지느냐는 두 기울기의 싸움이다. 공급이 가격에 둔하게 반응하고 수요가 민감하면 모이고, 그 반대면 퍼진다. 아래에서 공급선(주황)과 수요선(청록)의 끝 손잡이를 끌어 기울기를 바꾸고, 그래프의 다른 곳을 누르면 그 물량에서 출발한다.
거미집 모형: 모일까, 퍼질까
가격 편차는 한 기마다 \(-b/d\)배가 된다. \(b/d < 1\)이면 진동이 줄어들고, \(b/d > 1\)이면 커진다. 부호가 음수라서 한 번은 넘치고 한 번은 모자란다. 메모리 산업은 호황기에 공급 반응이 크고(모두가 증설한다) 수요 반응은 작다(값이 내려가도 당장 더 사지 않는다). 거미집이 퍼지는 쪽에 가깝다. 실제로는 가격이 바닥에 닿으면 감산과 파산이, 천장에 닿으면 수요 이탈이 경로를 붙잡는다. 2008~2009년 DRAM 가격 폭락 끝에 독일의 키몬다가 2009년 파산했고, 일본의 엘피다는 2012년 파산해 이듬해 마이크론에 인수됐다. 거미집이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플레이어 수가 줄었다.
채찍 효과: 위로 갈수록 커지는 주문
세 번째 장치는 공급망에 있다. 칩 회사는 소비자를 직접 보지 못한다. 소비자가 스마트폰을 사면, 판매점이 기기 제조사에, 기기 제조사가 부품 유통에, 유통이 칩 회사에 주문한다. 단계마다 각자 수요를 예측하고, 납기만큼 미리 재고를 쌓아 둔다. 소비자 수요가 10% 늘면 판매점은 "앞으로 더 늘겠다"며 그 이상을 주문하고, 위 단계는 부풀려진 주문을 또 부풀린다. 손잡이를 살짝 흔들었는데 채찍 끝은 크게 휘는 모양이라 채찍 효과(Bullwhip effect)라 부른다.
아래 그래프를 누르면 그 주에 소비자 수요가 잠깐 튄다. 오른쪽으로 갈수록(칩 제조사 쪽으로) 주문선이 얼마나 크게 흔들리는지 본다.
채찍 효과: 소비자 10%가 칩 회사에는 몇 %인가
소비자 수요는 10% 움직였을 뿐인데 칩 제조사의 주문은 수십 % 뛰었다가 정상 아래로 꺼진다. 아무도 비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단계마다 자기에게 들어온 주문을 보고 합리적으로 재고를 맞췄을 뿐이다. 이 효과는 장비 회사로 가면 더 커진다. 칩 회사의 주문이 조금만 늘어도 증설 결정이 나오고, 장비 주문은 칩 매출보다 훨씬 크게 출렁인다(7장).
지금은 사이클의 어디인가
사이클을 만드는 장치를 알았으면 거꾸로 신호를 읽을 수 있다. 업계가 가장 많이 보는 두 지표는 재고와 가격 변화다. 재고가 적고 가격이 오르면 호황이다.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는데 가격이 아직 높으면 꼭대기를 지나는 중이다. 재고가 많고 가격이 떨어지면 불황, 재고가 줄기 시작하고 가격 하락이 멈추면 바닥이다.
이 네 국면을 재고(가로축)와 가격 변화(세로축)의 평면에 놓으면, 사이클은 이 평면 위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고리가 된다. 아래에서 모델 회사의 궤적이 도는 모습을 보고, 점을 끌어 다른 조합을 놓아 보자.
사이클 시계: 재고와 가격으로 국면 읽기
궤적이 원을 그린다는 것은 두 지표가 약 4분의 1 주기만큼 어긋나 있다는 뜻이다. 가격이 꼭대기일 때 재고는 바닥이고, 가격이 가장 빨리 떨어질 때 재고가 가장 빨리 쌓인다. 실제 업계는 여기에 가동률, 고객사 재고 일수, 수주 대 출하 비율(B/B), 장비 주문 등을 더해 판단한다. 어떤 지표도 꼭대기와 바닥을 정확히 맞히지는 못한다. 신호는 늘 늦거나 시끄럽다.
언제 투자할 것인가
사이클 속의 회사가 내리는 가장 큰 결정은 증설 시점이다. 직관은 "돈을 벌 때, 칩이 모자랄 때 짓자"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결정한 팹은 2년 뒤에 돌아간다. 그때 시장이 어디에 있을지가 중요하다. 게다가 호황에는 장비 값과 건설비도 오르고 납기도 길어진다.
직접 해 보자. "시작"을 누르면 시간이 흐르고 가격이 그려진다.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적당하다 싶을 때 "증설!"을 누르거나 그래프를 누르면 증설을 결정한다(최대 3번). 끝나면 내 결과를 두 가지 자동 전략과 비교한다.
투자 타이밍 게임: 언제 팹을 지을까
대부분의 시나리오에서 불황 투자 전략이 호황 추격 전략을 이긴다. 바닥에서 결정한 팹은 값싸게 지어지고, 2년 뒤 회복기에 가동된다. 꼭대기에서 결정한 팹은 비싸게 지어져 다음 불황에 문을 연다. 이것이 역주기 투자(Counter-cyclical investment)다. 한국 메모리 산업이 1980~1990년대 불황기에 투자를 이어 가 점유율을 넓힌 것이 자주 드는 예다.
하지만 쉬운 전략은 아니다. 불황기에는 이익이 없고 현금이 마른다. 역주기 투자를 하려면 불황을 버틸 현금과 차입 여력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역주기로 투자하면 그것은 더 이상 역주기가 아니다. 그리고 바닥이 언제인지는 지나고 나서야 안다. "미래 미리 보기"를 끄고 하면 이 게임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반도체 회사들의 투자 결정은 16장 산업 실험실에서 다시 해 본다.
AX-1은 언제 출시할 것인가
노바실리콘은 팹이 없는 팹리스다. 생산 능력을 짓지는 않지만, 사이클에서 자유롭지 않다. AX-1 한 개에 들어가는 HBM 원가(기준 약 1,728달러)는 메모리 사이클을 따라 움직이고, 3 nm 웨이퍼 값과 할당량은 파운드리의 가동률을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생산 능력은 2년 전에 예약해야 한다. 아래에서 출시 시점(4분기 구간)을 끌어 옮겨 보자.
AX-1 출시 시점과 조달 원가
출시 시점에 따라 원가가 약 ±10% 흔들린다
기준 조건(메모리 가격 지수 1)에서 AX-1의 완성 원가는 약 4,257달러이고 그중 HBM이 약 1,728달러다. 위 모델에서 메모리 사이클의 꼭대기(지수 약 1.45)에 출시하면 HBM 원가가 약 2,200달러, 완성 원가가 약 4,790달러로 오르고, 공급 할당 탓에 첫해 판매 가능 수량이 약 34만 개로 줄어든다. 첫해 매출총이익은 기준 약 83억 달러에서 약 69억 달러로 준다. 바닥(지수 약 0.65)에 출시하면 완성 원가는 약 3,840달러로 내려가지만 고객 수요가 약 37만 개로 줄어 이익은 약 79억 달러다. 판매가 25,000달러에 매출총이익률 80% 안팎인 칩이라 원가 변동보다 수량의 변동이 첫해 이익을 더 크게 흔든다.
더 큰 위험은 지연이다. 3 nm 웨이퍼와 2.5D 패키징, HBM은 출시 약 2년 전에 생산 능력을 예약해야 한다. 호황 한가운데서 예약하면 비싼 장기 계약에 묶인 채 불황에 출시할 수 있고, 불황에 예약을 망설이면 호황에 물량을 받지 못한다. 연 1.46만 장(월 약 1,220장)의 3 nm 웨이퍼를 2년 앞서 약속하는 것은 노바실리콘이 사이클에 거는 내기다.
핵심 정리
- 세계 반도체 매출은 1986~2024년 연평균 약 9% 성장했지만 해마다 −32%(2001년)에서 +37%(2000년)까지 흔들렸다. 역성장한 해가 열 번 가까이 된다.
- 메모리 매출의 성장률 표준편차는 전체 시장의 약 세 배다. 2023년 약 −30%, 2024년 약 +80%였다.
- 증설에서 가동까지 1.5~2년의 지연이 있고 회사들이 같은 가격 신호에 동시에 반응하면, 외부 충격 없이도 주기 3~6년의 사이클이 저절로 생긴다. 지연이 길고 반응이 클수록 진폭이 크다.
- 범용품인 메모리는 수요가 줄면 물량 대신 가격이 무너진다. 수요가 비탄력적일수록(ε가 작을수록) 가격 변동이 수요 변동의 몇 배가 된다. 계약 가격의 로직은 가동률로 흡수한다.
- 거미집 모형에서 가격 편차는 한 기마다 −b/d배가 된다. 공급 반응이 수요 반응보다 크면 진동이 커지고, 결국 감산·파산이 경로를 붙잡는다.
- 공급망의 단계마다 예측과 안전 재고가 더해져, 소비자 수요의 작은 변화가 칩 제조사와 장비 회사에서 몇 배로 커진다(채찍 효과). 2021~2023년의 칩 부족과 재고 과잉이 그 예다.
- 재고와 가격 변화의 평면에서 사이클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재고 적음·가격 상승은 호황, 재고 많음·가격 하락은 불황이다.
- 증설은 2년 뒤를 보고 해야 한다. 불황기 투자는 싸게 짓고 회복기에 가동되어 대체로 유리하지만, 버틸 현금이 있어야 가능하다.
확인 퀴즈
증설 지연 모형에서 외부 충격이 전혀 없는데도 큰 사이클이 계속 생기는 조건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수요의 가격 탄력성이 0.5인 범용품 메모리 시장에서 생산량이 그대로인 채 수요가 10% 줄었다. 가격과 매출은 대략 어떻게 되는가?
채찍 효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재고가 정상의 1.5배로 쌓여 있고, 가격은 여전히 떨어지고 있지만 하락 폭이 줄어들고 있다. 사이클 시계에서 다음에 올 국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