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한국은 세계 메모리의 절반 이상을 만들고, 반도체 한 품목으로 나라 수출의 5분의 1을 번다. 그런데 칩을 설계하는 도구, 공장을 채우는 장비,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는 존재감이 작다. 이 장은 한국 반도체를 가치사슬 지도 위에 올려놓고 강점과 빈칸을 숫자로 본다.
- 한국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과, 그 숫자가 메모리 가격을 따라 출렁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 가치사슬 단계별 한국 점유율을 읽고, 메모리·웨이퍼 제조의 강점과 EDA·장비·로직 설계의 빈칸을 구분한다.
- 2019년 소재 수출 규제와 HBM 경쟁을 사례로 한국 반도체의 위험과 기회를 계산해 본다.
- AX-1 한 개의 값 가운데 한국이 가져가는 몫을 공급사 선택에 따라 계산한다.
가치사슬의 강점과 빈칸
수출액이 크다고 가치사슬 전체가 강한 것은 아니다. 13장에서 본 SIA·BCG의 단계별 점유율을 한국 하나만 뽑아 거미줄 그림으로 그리면 모양이 한쪽으로 크게 찌그러져 있다.
축을 눌러 그 단계의 한국 기업과 1위 지역과의 격차를 보자. 오른쪽 막대는 단계의 크기(세계 부가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중) 가운데 한국이 가져가는 몫이다.
한국 가치사슬 레이더: 어디가 튀어나오고 어디가 비었나
한국의 전체 부가가치 점유는 약 12%로 일본(약 14%)과 비슷하지만 구성이 전혀 다르다. 일본은 장비·소재·아날로그에 넓게 퍼져 있고, 한국은 메모리 한 축과 그것을 만드는 웨이퍼 제조에 몰려 있다. 메모리 설계 점유 약 58%가 한국 점수의 대부분을 만든다.
빈칸은 세 곳이다. 설계 도구(EDA)와 핵심 IP는 거의 0이고, 장비는 약 3%, 산업에서 가장 큰 단계인 로직 설계는 약 4%다. 소재(약 16%)와 후공정(약 9%)은 중간이다. 강점이 한 단계에 몰려 있다는 것은 그 단계의 가격이 흔들릴 때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가 한국 반도체를 만드는가
한국 반도체 기업 목록을 매출 순으로 세우면 두 회사가 압도한다. 삼성전자 DS 부문과 SK하이닉스의 2024년 반도체 매출은 합쳐 약 1,290억 달러다. 그 뒤로 소재·장비·팹리스·후공정 기업들이 있지만, 가장 큰 곳도 20억 달러 안팎이다.
한국 반도체 기업 지도: 두 거인과 긴 꼬리
세계 반도체 기업 순위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2024년 엔비디아, TSMC 다음 자리를 다툰다(집계 기준에 따라 순서가 바뀐다). 반면 한국 팹리스 1위인 LX세미콘의 매출은 약 14억 달러로 세계 팹리스 상위 10위 밖이다. 대만은 미디어텍(약 166억 달러) 같은 대형 팹리스를 키웠지만 한국은 아직 그런 회사가 없다.
장비·소재 쪽에는 SK실트론(웨이퍼), 동진쎄미켐(레지스트), 솔브레인(식각액), 세메스·원익IPS·한미반도체(장비) 같은 회사들이 있다. 이들의 큰 고객은 대개 같은 두 회사다. 고객이 둘뿐이면 그 두 회사의 투자 계획이 곧 생태계 전체의 매출 계획이 된다.
반도체 벨트: 반경 50 km 안의 공장들
한국의 메모리 팹은 서울 남쪽의 좁은 띠에 몰려 있다. 삼성전자의 화성·기흥·평택, SK하이닉스의 이천·청주, 그리고 건설 중인 용인 클러스터. 이 띠가 세계 DRAM 생산의 큰 몫을 만든다.
지도의 원을 끌어 옮기고 반지름을 바꿔 보자. 원 안에 한국 웨이퍼 생산능력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숫자로 나온다. 거점을 누르면 그곳의 역할과 숙제가 나온다.
클러스터 지도: 원 하나에 몇 %가 들어가나
반지름 40 km 원 하나에 한국 웨이퍼 생산능력의 대부분이 들어간다. 집적은 강점이다. 협력사가 가깝고, 엔지니어가 오가며, 물류가 짧다. 동시에 한 지역의 정전·지진·가뭄이 세계 메모리 공급을 흔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21년 대만 가뭄 때 TSMC가 물차로 용수를 실어 나른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삼성전자 국가산업단지 + SK하이닉스 일반산업단지)는 다 지어지면 전력 수요가 약 10 GW 이상(대형 원전 약 10기 분)으로 계획되어 있다고 보도되었다. 용수도 하루 수십만 톤 이상이 필요하다. 송전선 경로, 발전원, 취수원을 정하는 일이 공장 건설보다 오래 걸릴 수 있다. 수치는 계획·보도 기준이며 단계별로 바뀐다.
메모리 60%, 시스템 3%
한국 반도체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메모리는 세계 1위, 시스템 반도체는 약 3%"다. 2024년 세계 반도체 매출 약 6,300억 달러 중 메모리는 약 1,650억 달러, 나머지 약 4,670억 달러가 로직·아날로그·MCU·센서 같은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다.
아래 지도는 세계 시장을 제품별 넓이로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몫을 초록으로 칠한 것이다. 시스템 반도체 점유율을 올리는 목표와 메모리 가격 변화를 함께 움직여 보자.
시스템 반도체 점유율이 X%가 되면?
메모리 가격이 반으로 떨어지면 한국 반도체 매출은 약 40% 넘게 줄어든다. 시스템 반도체 점유를 10%로 올리면 같은 충격이 약 3분의 1 수준(약 34%)으로 줄어든다. 시스템 반도체 시장이 메모리보다 약 3배 크고 가격이 덜 출렁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시스템 반도체 육성'을 반복해서 내세우는 경제적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점유율 1%p는 약 47억 달러다. 시스템 반도체는 제품 종류가 수천 가지이고, 각각 고객과 설계 IP, 오랜 신뢰가 필요하다. 메모리처럼 공정과 투자 규모로 이기는 게임이 아니다. 6장의 팹리스 경제학이 그대로 적용된다.
소부장: 2019년의 시험
2019년 7월 일본 정부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세 품목(고순도 불화수소, EUV용을 포함한 포토레지스트, 불화 폴리이미드)의 한국 수출을 개별 허가제로 바꿨다. 실제 공급이 끊기지는 않았지만, 한국 팹이 일본 소재에 얼마나 기대고 있는지가 드러났다.
그 뒤 한국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국산화와 수입처 다변화에 나섰다. 아래에서 연도 막대를 끌어 일본 의존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고, 공급이 실제로 끊겼다면 생산이 얼마나 멈췄을지 계산해 보자.
소부장 국산화: 같은 차단이 지금이라면?
불화수소는 국내 업체(솔브레인, SK머티리얼즈(현 SK스페셜티), 램테크놀러지 등)의 증설과 공정 인증으로 일본 수입 비중이 크게 줄었다. 불화 폴리이미드는 폴더블 디스플레이용으로 국산 제품이 빠르게 들어왔다. 가장 어려운 것은 EUV 레지스트였다. 일본 회사의 해외 공장(벨기에 등)을 통한 수입처 다변화가 먼저 이뤄졌고, 국산화는 아직 진행 중이다.
교훈은 두 가지다. 소재 하나의 시장은 작아도(8장) 끊기면 수십조 원 규모의 생산이 멈출 수 있다. 그리고 국산화의 실제 병목은 생산이 아니라 공정 인증(Qualification)이다. 새 소재를 양산 라인에 넣으려면 수개월의 수율 검증이 필요하다.
HBM: 한국이 다시 앞선 자리
AI 가속기 옆에 쌓는 고대역폭 메모리(HBM)는 DRAM 다이를 TSV로 8~12층 쌓은 제품이다. 10장에서 본 것처럼 일반 DRAM보다 비트당 몇 배 비싸고,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세 곳뿐이다. 그중 두 곳이 한국 회사다.
HBM 경쟁: 점유율과 돈
HBM 시장은 2023년 약 45억 달러에서 2025년 약 340억 달러(추정)로 커졌다. HBM은 일반 DRAM보다 다이 면적을 2~3배 쓰고 쌓는 과정에서 수율을 잃기 때문에, HBM을 늘리면 일반 DRAM 공급이 줄고 가격이 오른다. AI 수요가 한국 메모리 전체를 끌어올린 경로가 이것이다.
동시에 HBM은 고객이 몇 곳뿐인 시장이다. 가속기 회사 한두 곳의 인증 결과에 따라 점유율이 한 해에 10~20%p씩 움직인다. 2024년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엇갈린 실적이 그 예다. 기술 선두는 영원하지 않고, 다음 세대(HBM4)에서는 맨 아래 베이스 다이(Base die)를 파운드리 로직 공정으로 만들면서 메모리 회사와 파운드리의 협업이 새 변수가 된다.
AX-1에서 한국의 몫
이어지는 타깃 AX-1로 돌아가자. 판매가 25,000달러, 완성 원가 약 4,257달러인 이 칩 한 개에서 한국 기업은 얼마를 가져가는가? 아래 흐름도는 원가(또는 판매가)를 항목별로 나눠 어느 지역으로 흘러가는지 보여 준다. HBM 공급사와 다이 제조사를 바꿔 보자.
AX-1 한 개의 돈은 어디로 가나
HBM 하나가 한국 몫의 거의 전부다. 다이를 만드는 웨이퍼 안에 들어간 한국 소재·장비의 몫은 개당 20달러 남짓에 그친다. 반대로 말하면 AX-1 같은 칩이 하나 팔릴 때 한국이 받는 돈은 HBM 공급 계약 하나에 달려 있다.
AX-1 한 개에서 한국 몫은 약 1,840달러
HBM 6스택(144 GB) 원가 약 1,728달러는 패키징 불량으로 버리는 몫까지 더하면 좋은 칩 하나당 약 1,820달러가 된다. 한국 기업이 HBM을 공급하면 여기에 웨이퍼 속 한국 소재·장비 몫 약 20달러를 더해 약 1,840달러, 판매가 25,000달러의 약 7%, 완성 원가 약 4,257달러의 약 43%다. 첫해 40만 개면 약 7.4억 달러다. 마이크론이 HBM을 가져가면 한국 몫은 개당 수십 달러로 떨어진다.
핵심 정리
- 반도체는 2024년 한국 총수출의 약 21%(약 1,420억 달러)를 차지하는 1위 품목이고, 그 금액은 세계 메모리 사이클을 따라 한 해에 25% 넘게 오르내린다.
- 한국의 가치사슬 점유는 전체 약 12%이지만 메모리(약 58%)와 웨이퍼 제조(약 19%)에 몰려 있고, EDA·IP는 거의 0, 장비 약 3%, 로직 설계 약 4%가 빈칸이다.
-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한국 반도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팹리스·장비·소재 생태계는 두 회사를 주요 고객으로 둔다.
- 메모리 팹은 수도권 남부 반경 수십 km에 몰려 있다. 집적은 효율이지만 지역 위험과 전력·용수 숙제를 함께 만든다.
- 시스템 반도체 점유 1%p는 약 47억 달러다. 점유를 높이면 메모리 불황의 충격이 완충되지만, 팹리스 생태계를 키워야 하는 다른 게임이다.
- 2019년 소재 수출 규제 뒤 불화수소 등의 일본 의존도는 크게 줄었고, 국산화의 병목은 생산보다 공정 인증이었다.
- HBM은 한국 두 회사가 시장의 대부분을 갖는 제품이며, AX-1 한 개에서 한국 몫(약 1,840달러, 판매가의 약 7%)은 거의 HBM에서 나온다.
확인 퀴즈
2024년 한국 총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한 비중에 가장 가까운 것은?
SIA·BCG의 단계별 부가가치 점유(2019년 근사)에서 한국이 세계 1위인 단계는?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개별 허가 전환) 3품목에 들지 않는 것은?
AX-1(판매가 25,000달러) 한 개에서 한국 기업이 HBM을 공급할 때 한국 몫에 가장 가까운 것은?